김재동 목사의 신앙칼럼



정의와 평화의 입맞춤

최근 미국에서 백인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사망한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를 추모하는 시위가 미국의 여러 도시에서 들불처럼 번져나가더니 급기야 멀리 서울 도심에서도 열렸다고 합니다. 열흘이 지난 지금에는 열기가 다소 사그라들긴 했지만 아직도 울분을 삭이지 못한 모습이 역력합니다.

이번 시위에 등장한 구호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구호는 “정의없이 평화없다”(No justice, no peace)는 구호입니다. 여기에서 ‘정의’는 흑인을 위시한 약자들과 소외된 자들을 위한 정의라는 뉘앙스를 함의(含意)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후진성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을 지적한다면 아마도 인종차별일 것입니다. 특히 흑백분규로 인한 갈등은 미국 사회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고질적인 독소(毒素)이며, 이러한 갈등이 전국적인 갈등으로 비화되는 사례는 이제 낯설지 않은 일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정의가 세워지지 않으면 진정한 평화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정의와 평화가 입맞추는 것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85편 10-11)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

이 구절은 인애와 화평도 강조하지만 후반절의 문맥상 진리와 의에 방점이 찍혀있습니다.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출 때까지는” 진정한 평화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평화(샬롬)라는 말을 매우 진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샬롬(shalom)은 일반적으로 ‘평화’(peace)라고 번역하지만 사실상 매우 폭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저는 신학교에서 샬롬은 조금도 찌그러지지 않은 동그란 정원(正圓)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배웠습니다. 다시 말해서, 조금도 잘못되거나 결핍이 없는 완벽한 상태가 바로 샬롬입니다. 전쟁이 없는 상태는 물론이요 그 외에도 신체상의 불편이나 물질적인 결핍 그리고 무엇보다도 관계에 있어서 갈등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려면 평화가 정의와 나란히 가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기독교의 인간관은 성선설이 아니라 성악설입니다. 인간은 죄성을 타고난 죄인이며, 그러한 인간이 만드는 사회도 죄악된 사회입니다. 니콜라스 월터스토프(Nicholas Walterstorff)는 『정의와 평화가 입맞출 때까지』(Until Justice and Peace Embrace)라는 책에서 어느 라틴 아메리카인의 기도를 서두에 인용하고 있습니다.

“굶주린 자들에게는 빵을 주시고, 빵을 가진 우리에게는 정의에 대한 굶주림을 주소서.”

빵에 굶주린 자들(the hungry)과 정의에 대한 굶주림(hunger for justice)을 대비시킨 기도문입니다. 이번 시위에 등장한 팻말 중에는 ‘Honk for Justice’(정의를 위한 울부짖음)라는 구호를 적은 것도 눈에 띄었습니다. 인간의 기본 생존권을 침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권리를 무시하는 범죄행위이며, 깔뱅(Calvin)도 그의 설교를 통해 억압과 착취 등 부정한 방법으로 치부한 자들을 강도 높게 규탄하고 있습니다. 영어 단어 중에 hangry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hungry와 angry라는 두 단어가 합해진 말입니다. 화가 날 정도로 배가 고프다는 뜻인데, 기본 생존권을 박탈당한 자들의 심정을 표현하기에 접합한 단어가 아닐까 싶습니다. 결국 정의가 없는 평화는 거짓된 것이요, 평화가 없는 정의는 냉혹합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진정한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의가 함께 구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래 전 LA 폭동에서도 뼈저리게 경험했지만 이번에도 시위와 함께 약탈과 방화가 빈번하게 일어나 많은 뜻있는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습니다. 정의로운 평화적 시위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잿밥에만 눈독을 들인 일부 불순분자들의 소행이겠으나 군중심리에 부화뇌동하여 원래의 취지에서 벗어난 행동을 한 자들도 없진 않을 것입니다. 최근 여러 유투버들이 이번 폭동의 배후세력으로 트럼프 정부를 반대하여 그의 재선을 저지하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반파시스트(antifa)나 세계단일정부(New Order World) 수립을 목표로 삼고 있는 프리메이슨(Freemason)의 일파인 일루미나티(illuminati, 광명파)를 지목하고 있는데, 사실 여부는 잘 알 수 없지만 그 배후세력이 누구든 인종차별을 타파하고 정의로운 평화의 세계를 지향하려고 애쓰는 자들의 대의명분을 희석시키는 경거망동은 삼가야할 것입니다. 목적이 정의로우면 수단도 정의로워야 합니다. 목적이 수단을 합리화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요즘 ‘속담 비틀기’가 유행입니다. 속담이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현시대에 맞게 재해석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라는 게 그 이유입니다. 이를테면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속담도 그렇습니다. 이런저런 해석이 있긴 하나 대체적으로 수단이나 방법은 어찌 되었든 목적만 이루면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과정은 아랑곳하지 않는 결과중심주의를 대변하는 속담입니다. 한 흑인의 죽음이 백인 경찰의 폭력에 가까운 과잉진압의 결과로 인한 것이라고 시위를 벌이는 마당에 기물과 시설의 파괴와 같은 폭력적인 행위나 타인의 재산을 강탈하는 약탈행위 등은 그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비폭력‧무저항의 삶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간디는 독실한 힌두교 신자였지만 예수님을 존경했고 산상수훈을 좋아했습니다. 그는 “나는 예수님은 좋아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교훈대로 살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무저항‧ 비폭력 정신은 산상수훈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바로 그 정신으로 영국의 식민통치와 싸워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는 폭력을 절대악으로 간주했으며, 폭력에 대항하여 폭력으로 맞서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을 낳는 악순환의 고리가 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잠언 10:12)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로마서 12: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