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동 목사의 신앙칼럼



고난의 유익



‘고난의 유익’이란 말은 그 자체로서 모순된 표현인 것 같이 보입니다. 고난이 유익이라니? 이것은 이른바 ‘찬란한 슬픔’이나 ‘군종 속의 고독’ 등과 같은 성격의 형용모순적 표현(oxymoron)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찬송가 중에 “면류관 벗어서 주 앞에 드리세 / 그 손과 몸의 상처가 영광 중 빛나네 / 하늘의 천사도 그 영광 보고서 / 고난의 신비 알고자 늘 흠모하도다”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고난의 신비’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영광은 마치 물과 기름처럼 물리적으로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요소들이지만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서 화학적으로 케미를 이루어 인류구속이라는 대업(大業)을 이루게 되었으니 이것이야말로 천사도 흠모하는 신비가 아닌가 하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은 참으로 신비로운 것입니다. 고난과 유익은 물리적인 융합이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신뢰하는 믿음 안에서 묘한 화학적 케미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가리켜 ‘변장된 축복’이라고도 하고, “모든 좋은 것은 고난의 보자기에 싸여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시편 119:67, 71)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편 기자는 고난당한 것이 도리어 자신에게 유익이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율례들을 배움으로써 자신의 잘못을 고치게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바른 삶을 살게 되었으며, 궁극적으로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게 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저명한 기독교 저술가인 루이스(C. S. Lewis)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무서운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지 않는 습성이 있다. 이런 자들에게 고통은 귀머거리에게 알아듣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확성기라고 할 수 있다.”

빠스깔은 “하나님은 나에게 하나님을 섬기라고 건강을 주셨건만 나는 세상을 위해 다 써버리고 말았다. 이제 하나님은 나를 일깨워 주시려고 나에게 육신의 병을 주셨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천로역정』을 쓴 죤 번연은 40세에 시각장애인이 되었고 아내마저 잃어버렸습니다. 그 때 그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오, 주님! 이런 고통들을 통하여 내 영혼이 수그러짐은 나의 창조주를 섬기기 위함입니다. 고난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인격을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로마서 5:3-4)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Not only so, but we also rejoice in our sufferings, because we know that suffering produces perseverance; perseverance, character; and character, hope.)

이 구절에서 ‘연단’이라는 단어는 ‘인격’(character)을 의미합니다. 고난을 당할 때 믿음으로 참고 견디면 마침내 우리의 인격이 연마되며, 이러한 신앙인격이 갖춰질 때 비로소 우리에게 참된 소망이 있게 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사실 고난의 목적이 형벌이든 징계든 연단이든 또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든 그 자체로서 유쾌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겸손한 마음으로 그 고난을 참고 견디어내면 마침내 좋은 결말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6,10-11)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을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그들은(육신의 아버지들) 잠시 자기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이러한 말씀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고난은 우리를 연단하기 위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은혜의 방편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 고난 그 자체 보다는 그 고난을 통해 우리를 다루시는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피난길에 올랐을 때 사울 왕가의 시므이가 온갖 못된 짓을 해댔지만 다윗은 “만일 하나님께서 시므이를 시켜서 나를 저주하라 하셨다면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하면서 그 모든 모욕을 달게 받았습니다. 다윗은 그 사건을 단순히 너와 나의 수평적인 차원에서만 보지 않고, 나와 하나님의 수직적인 관점으로 옮겨서 해석하려고 했던 성숙한 믿음이 소유자였습니다.

지금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 모두들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루 속히 백신을 개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예방주사는 우리 몸에 인공적으로 균을 집어넣음으로써 항체를 만들어 면역력을 키우는 방법입니다. 우리 모두 이때 고난의 백신으로 우리 신앙의 면역력을 키울 수 있다면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고 도종환 시인이 노래했듯이, 지금의 이 고난을 일종의 성장통(growing pain)이라 생각하면서 이 고난을 낭비하지 않고 재활용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고난은 쓰레기(trash)가 아니라 보화(treasure)로 변신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 코로나 사태가 우리의 삶을 좋은 의미에서 BC(Before Corona)와 AD(After Disease)로 가름하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구세군의 창시자인 윌리암 부스(William Booth)의 말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나의 성공의 비결은 고난이 올 때마다 한 걸음씩 전진한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