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동 목사의 신앙칼럼

김재동 원로목사 프로필


서울대학교 영문과, 전 청소년재단 이사장, 해외한인장로회(KPCA) 총회장 역임, 현 서울장로교회 원로목사, 전 워싱턴한인교회 협의회 회장



구원의 보증



지난 칼럼에서 ‘성령의 인(印)치심’은 안전과 권위와 진정성과 소유권을 함축하고 있으며, 이것은 우리의 구원과 기업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보증해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구원의 보증’과 관련해 또 다른 각도에서 보충설명을 드리려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1:21-22)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이 구절에서 ‘보증’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아라본’(arrabon)인데, 히브리어 ‘에라본’을 음역한 것입니다. ‘에라본’은 원래 상업용어로서, 어떤 물건을 구입하기 위해 첫 번째 할부금으로 지불하는 돈을 의미합니다. 영어성경에는 이러한 의미를 최대한 살려서 서양 문화에 맞춰 first installment, downpayment, deposit, earnest money 등 아주 다양한 단어로 번역돼 있습니다.

가령 집을 구입할 때 집값의 일부를 선금으로 내고 일단 입주를 하게 됩니다. 이때 지불하는 돈을 downpayment라고 합니다. 그 다음부터 매달 모기지를 착실하게 물어가기만 하면 언젠가는 완불(pay off)하게 되고, 그러면 완전히 내 집이 되는 것입니다. 자동차와 같이 고가의 물품을 구입할 때도 일시불로 사는 게 부담스러울 때는 일정한 기간 분할을 하게 되는데, 그때 첫 번째 분할금을 first installment라고 합니다. 이 경우에도 역시 약속대로 완불을 하면 완전히 내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일정 금액을 입금하도록 요구하는데 그것을 deposit라고 합니다. 그리고 특히 부동산을 구입할 때 장난삼아 그저 해보는 게 아니라 조건만 맞으면 틀림없이 구입하겠다는 ‘진지한’ 마음을 보여주기 위해 계약금조로 입금하는 돈을 earnest money라고 합니다. 이 모든 경우에 약속대로 착실하게 이행하기만 하면 지불 만기가 될 때 완전한 자기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원리가 구원에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보증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 안에 내주(內住)하시는 성령님이 우리의 궁극적인 구원의 보증인(guarantor)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미국에서 세탁소와 같은 사업체를 구입할 때 매상을 체크하는 과정을 ‘개런티(guaranty)를 본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을 칭의(稱義)라고 합니다. ‘의롭다고 일컬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구원은 우리가 주님 앞에 가서 완전한 구원을 받을 때까지, 다시 말해서 영화의 단계에 이를 때까지 계속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화(聖化)라고 합니다. 요컨대, 구원이란 칭의와 성화와 영화를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사도 바울도 빌립보서 2:12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한글 번역으로만 보면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다분합니다. 마치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여기에서 누리고 있는 구원에 어떤 결함이나 부족함이 있는 ‘미완성의 구원’으로 잘못 읽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에서 ‘이루라’는 말은 영어성경에서는 본 의미를 살려 ‘work out’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continue to work out your salvation with fear and trembling). work out은 체육관이나 피트니스 센터에서 다양한 기구들을 이용해 몸을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차피 구원을 받았으니 이제 손 놓고 있어도 된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구원받은 자의 삶에 합당하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끊임없이 성화의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라는 의미로 새겨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 구원은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러한 구원의 긴장상태를 두고 신학자들은 “already, but not yet"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긴장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가 다녔던 신학교의 교수님 중에 이러한 상태를 마당놀이에서 광대가 외줄을 타는 것에 비유하신 적이 있습니다. 잠시라도 방심해서 균형을 잃어버리면 줄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본성적으로 긴장을 싫어합니다. 그러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고, 그 결과로 구원받았으니 이제 무슨 짓거리를 해도 천국은 따 놓은 당상이라는 식의 잘못된 신앙행태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이런 식의 신앙은 지양되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구원의 확신에 대하여 어정쩡한 태도를 가져서도 안 됩니다. “내가 구원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는 죽어봐야 알지 지금 당장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반문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구원이 자신의 행위에 의해 좌우된다고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왜 내가 구원받을 자로 택함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이상 그 구원은 나의 행동 여하에 상관없이 취소될 수 없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만일 나의 행위가 구원을 좌지우지한다면, 신앙생활을 착실히 할 때는 구원받을 것 같다가도 신앙생활을 엉터리로 하면 구원 못 받을 것 같이 생각이 들고, 이렇게 오락가락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게 됩니다. 우리는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은 것(Once saved, forever saved!)”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깔뱅의 5대 강령’ 중에 ‘성도의 견인(堅忍)’(Perseverance of the Saints)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구원하신 자는 구원에 이르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끌어주신다는 교리입니다. 물론 이 교리는 성경에 근거한 교리입니다. 우리는 비록 이성적으로 수긍이 되지 않더라도 종교개혁자들의 모토처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직 ‘성경이 가는 데까지 가고 성경이 멈추는 데서 멈추는’ 성경 중심의 신앙을 견지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