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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동 목사의 신앙칼럼

강남중 기자

김재동 원로목사 / 프로필


서울대학교 영문과, 전 청소년재단 이사장, 해외한인장로회(KPCA) 총회장 역임, 현 서울장로교회 원로목사, 전 워싱턴교역자회 회장, 전 워싱턴한인교회 협의회 회장, 목회학박사과정 수료, 워싱턴신학교(WTS) 기독교교육 박사과정 이수 중, PDSO, 강사



유머리스트(humorist) 예수님



얼핏 예수님과 유머는 마치 갓 쓰고 양복을 입은 것처럼 뭔가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느낌입니다. 성경에 예수님은 세 번 우신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멸망이 임박한 예루살렘 성을 보시며, 그리고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통곡하시며 눈물로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웃으셨다는 구절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늘 근엄하시고 진지하시며 심각하신 분, 유머 같은 것은 아예 입에 올리시지도 않는 소위 ‘노잼’으로 재단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이 예수님의 모든 행적을 낱낱이 다 기록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맨 마지막 절인 21장 25절을 보면,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한 줄 아노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유추해 보건대, 예수님이 생애에 딱 세 번만 우셨다고 우길 필요는 없으며, 성경에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구절이 없다고 해서 예수님이 한 번도 웃으신 적이 없는 고지식하고 고리타분한 분이라고 말하는 것 또한 무리한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물론 저질스러운 농담을 하시지는 않았지만 의외로 유머러스한 분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미국의 철학 교수이며 신학자인 츄르블러드(David Elton Trueblood)는 『The Humor of Christ(그리스도의 유머)』라는 책에서, 예수님은 논쟁과 비유와 대화를 통해 여러 상황에서 유머와 해학과 위트와 역설(paradox)을 적절하게 사용하셨음을 공관복음서를 통해 제시하면서 예수님은 가히 ‘유머리스트’라고 부르기에 전혀 손색이 없는 분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는 유머나 위트를 불경건하다거나 신성모독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것은 잘못된 경건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 당시 오만방자하고 젠체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향한 예리한 풍자와 위트는 유머러스트 예수님의 진면목을 잘 반영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면모가 집중적으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부분은 마태복음 23장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말과 행동이 다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위선에 대하여 섬뜩하리만치 신랄한 어조로 집중포화를 쏟아붓고 계십니다.



프린스톤 신학교의 교수였던 브루스 메츠커(Bruce M. Metzer) 박사는 『신약성서개설』(The New Teatament: its background, growth and content)에서 예수님이 사용하셨던 다양한 표현법에 대하여 비교적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저는 전도사 시절에 신학석사 과정을 하면서 제가 모시던 신약학 교수님의 부탁으로 제법 두꺼운 이 책을 완역했기 때문에 그 내용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책 내용 중에 예수님의 언어유희(pun)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외식(外飾)을 정죄하시면서 “맹인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마태복음 23:24)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여기서 하루살이에 해당하는 아람어는 칼마(qulma)이고 낙타에 해당하는 아람어는 감라(gamla)입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 유대인들의 일상 언어였던 아람어를 사용하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회화적(繪畵的)인 어법은 예수님의 언어유희에 신랄함을 더해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요한복음 3장에 기록된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중의법(重義法)을 사용하여 성령의 역사를 바람의 현상으로 설명하시기도 합니다. 성령과 바람은 아람어로 루아흐(ruha)인데, 공교롭게도 신약 언어인 헬라어 프뉴마(pneuma)도 꼭 같이 두 가지 의미를 지닌 중의적 단어입니다. 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 베드로를 향해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하셨는데, 아람어로 베드로의 유대식 이름인 게바(Kepha)는 반석이라는 뜻도 있으니 이 또한 절묘한 언어유희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과장법을 사용해 메시지의 효과를 극대화하시기도 했습니다. 일례로,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복음 7:3)라는 말씀에서 티와 들보의 극명한 대조와 함께 ‘눈 속에 있는 들보’라는 과장을 통해 말씀의 효과를 극대화하시는 기지를 발휘하셨습니다. 석 자나 되는 수염, 전봇대처럼 큰 이쑤시개, 삼 년 같은 하루를 연상케 하는 이른바 ‘뻥튀기 표현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예수님은 그 당시 민간에 통용되던 격언이나 속담 그리고 폐부를 찌르는 촌철살인적인 표현들, 나아가 청중들의 기대를 완전히 뒤엎는 반전의 화술을 통해 메시지의 효과를 최대한으로 높이실 줄 아는 언어의 마술사였습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다”(마태복음 13:34)고 성경이 기록할 정도로 비유의 달인이셨으며, 천국의 비유들은 비유의 압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약학자인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는 “비유란 땅의 것으로 하늘의 것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정의한 바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넓은 의미로는 다 유머의 영역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엘톤 츄러블러드 박사는 그의 저서에서, 우리가 성경 말씀에 너무나 익숙해진 나머지 기존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 어려운데다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에만 생각이 고착돼 있기 때문에 기쁨과 웃음의 종교인 기독교를 슬픔과 우울함의 종교로 만들어버렸다고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랄프 코작(Ralph Kozak)이 그린 ‘웃으시는 예수님’(Laughing Jesus)의 모습은 매우 낯설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이라고 한바탕 호탕하게 웃으시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고개를 뒤로 젖히시고 파안대소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때 우리는 왠지 마음의 평안과 친근감을 느끼게 됩니다.

동양문화권에서는 전통적으로 군자의 근엄함을 미덕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습니다. 왕조시대의 제왕적 리더십은 환영받지 못합니다. 특히 극한직업이라 할 수 있는 대통령의 필수적인 자질은 유머감각입니다. 미국의 대통령들 중 성공적으로 직무를 수행한 자들은 대부분 유머감각이 뛰어난 자들이었다고 합니다. 35년간 미국 연방 상하원 의원을 지낸 밥 돌은 위트와 유머가 대통령의 필수 자질이라고 주장하면서 이와 관련된 책을 저술하기도 했습니다. 때로 유머 한 마디가 팽팽한 긴장상태를 순식간에 해소해주기도 합니다. 천재적인 유머감각을 지니신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도 격조있는 유머감각을 키우는 일에 힘쓴다면 보다 더 원만한 사회생활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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