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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동 목사의 신앙칼럼

강남중 기자

김재동 원로목사 / 프로필


서울대학교 영문과, 전 청소년재단 이사장, 해외한인장로회(KPCA) 총회장 역임, 현 서울장로교회 원로목사, 전 워싱턴교역자회 회장, 전 워싱턴한인교회 협의회 회장, 목회학박사과정 수료, 워싱턴신학교(WTS) 기독교교육 박사과정 이수 중, PDSO, 강사



오해 받으신 예수님



오늘은 종려주일(Palm Sunday)입니다. 종려주일은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날이며, 이 주간의 금요일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성금요일(Good Friday)로서 사순절의 절정을 이루는 날이기도 합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이 마지막 한 주간을 보내시기 위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날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맞이했기 때문에 붙여진 절기입니다. 그러나 겉옷을 길에 펴고 승리의 상징인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환호하면서 예수님을 맞이했던 바로 그 군중들이 몇 날이 채 못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악다구니를 치게 됩니다. 군중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하며 소리 높여 왕을 맞이했지만, 예수님이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줄 분이 아닌 것을 알고는 순식간에 배신자로 돌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철저하게 오해를 받으셨습니다.

복음서를 읽다 보면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내용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축사(逐禗)나 치유 기적 후 고침을 받은 자들에게, 그리고 변화산 사건 후 제자들에게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경계하시며 함구령을 내리셨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어떻게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기적 사건들을 널리 전파하라고 하셔야 할 상황에서 오히려 침묵 명령을 내리셨으니 예수님의 사역의 목적과는 일견 모순돼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19세기 말에 독일 신학자 브레데(William Brede)는 마가복음을 연구하면서 이와 관련해 ‘메시야 비밀(Messianic Secret)’이라는 용어를 고안해냈습니다. 그는 이러한 침묵 명령이 실제로 있었던 사실을 기록한 게 아니라 마가 자신의 신학적인 의도를 위해 고안해낸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마가의 신학적 의도인즉 예수님이 그의 생애 동안에는 짐짓 자신의 메시야됨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침묵 명령을 내리셨다는 것입니다. 그에 의하면, 예수님은 생전에 메시야로 고백되지 않았고 또 본인 자신도 메시야로 간주하시지 않았는데, 부활 후에 초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비로소 메시야로 고백되었을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변화산 사건 이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부활 전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신 마가복음 9:9을 주요 근거 구절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러한 브레데의 주장은 기발하긴 하지만, 마가복음에 나타난 비밀 모티브들을 소위 ‘메시야 비밀’이라는 가설로 지나치게 축소시켰을 뿐만 아니라 일관성도 결여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열세 개의 기적 사건이 나오는데, 세 경우 외에는 침묵 명령을 하시지 않았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함구령의 이유를 다른 측면에서 추론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 시절에 배운 바에 의하면, 예수님은 당신 자신에 대한 군중들의 오해로 인해 자칫 당신의 사역이 방해받을 것을 우려하셔서 함구령을 내리셨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 정치적·군사적·혁명적 메시야, 이를테면 ‘6백만 불의 사나이’ 같은 영웅을 대망하고 있었습니다. 성경학자들 중에는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이유를 이런 관점에서 설명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유다는 열혈당원이었습니다. 열혈당(열심당, Zealots)은 로마 식민통치에 폭력으로 항거한 국수 민족주의자들었습니다. 이들 중에서도 극우파들은 독립을 위해서는 살인도 불사한다며 단검을 품고 다녔기 때문에 시카리(Sicarii, 자객)라고 불리었습니다. 극우파 열혈당원인 유다는 예수님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주실 메시야로 믿고 따랐는데 그러한 자신의 기대가 무망(無望)한 기대라는 생각이 들자 예수님을 배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을 것입니다.

유다와 같은 생각을 품고 있던 유대인들의 눈에는 희한한 기적들을 베푸시는 예수님이야말로 영락없이 그들이 대망하던 바로 그 메시야였습니다. 그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본 후에는 그를 억지로 왕으로 옹립하려고 했던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빌라도의 법정에서도 말씀하셨듯이 온 인류의 메시야로 오셨지 이 세상의 왕으로 오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한참 오해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베푸신 후에 함구령을 내리신 또 다른 이유를 추론해볼 수 있습니다. 표적 신앙에 젖어있는 유대인들이 자칫 자기를 기적이나 베풀고 다니며 자신을 과시하는 소위 ‘기적꾼’으로 오해할 소지를 아예 차단하시려는 의도도 계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언젠가 “너희는 표적과 기사(signs and wonders)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4:48)고 말씀하신 적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하면서 희롱했던 종교 지도자들도 전통적인 기적 신앙의 굴레에서 탈피하지 못한 자들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은 한 평생 오해받으며 사셨던 분입니다. 심지어 가족들로부터 미쳤다는 오해를 받기도 하셨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었는데도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었다는 오해를 받으신 적도 있습니다. 불과 얼마 전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신통방통하게 신앙고백을 해서 주님께 칭찬을 받았던 베드로도 예수님을 오해한 나머지 예수께서 수난 예고를 하시자 예수님을 붙들고 책망하면서(rebuke) “언어도단도 유분수지, 어떻게 그런 일이 주님께 일어날 수 있단 말입니까?” 하고 항변하다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호된 꾸중을 듣게 됩니다. 베드로뿐만 아니라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의 나라를 이 세상의 나라로 오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들의 언행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사야 53장에 예언된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야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자칫 예수님을 오해할 수 있습니다. 비근한 예로, 예수 믿으면 무조건 복 받고 만사형통하다는 잘못된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지옥 형벌에 처해질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영혼의 구세주이십니다. 그런데도 예수 믿다가 어려움 당하면 신앙을 팽개쳐버리는 자들이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을 오해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비극입니다. 예수님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잘못된 기대를 갖게 되며, 잘못된 기대 때문에 실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종려주일을 맞아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맞이했던 군중들을 반면교사로 삼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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