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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동 목사의 신앙칼럼

강남중 기자

김재동 원로목사 프로필


서울대학교 영문과, 전 청소년재단 이사장, 해외한인장로회(KPCA) 총회장 역임, 현 서울장로교회 원로목사, 전 워싱턴한인교회 협의회 회장



온유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12월은 강림절기로 지키며 그 절정은 성탄절입니다. 강림절은 예수님의 ‘오심’을 기리는 절기로서, 첫 번째 오심 즉 초림과 두 번째 오심 즉 재림을 묵상하며 지내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12월은 이래저래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person and work)을 묵상하면서 우리의 신앙을 다시금 다지는 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예수님의 겸손에 대하여 함께 묵상해보았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온유함(gentleness, meekness)에 대하여 상고해보려고 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소개하시면서 “나는 마음이 온유한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온유함은 얼핏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온유한 모습과는 차이가 있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예수님은 때로 제자들을 무섭게 질책하시기도 하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위선적인 행태를 지적하시며 심지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육두문자를 사용하시는가 하면, 성전에서 장사하는 무리들을 향해 불같이 화를 내시며 채찍을 휘두르시기도 하셨습니다. 물론 이러한 예수님의 행동에 대하여 성경학자들은 ‘거룩한 분노’의 표출이라고 해석을 하지만, 적어도 겉으로 드러난 예수님의 모습은 온유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것으로 비치는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가리켜 온유하다고 하신 말씀에 선뜻 동의하기가 쉽지 않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온유의 본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빚어진 오해입니다.

온유하면 얼른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하는 무골호인의 이미지입니다. 한없이 물러빠져 착하기만 한 사람, 그저 부드럽기만 한 사람, 함부로 대해도 화를 낼 줄 모르는 사람, 뼈 없는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리는 무기력한 사람, 자기 의지라곤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연약하고 유약하기 짝이 없는 사람 등등 매우 다양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단어가 바로 온유입니다. 온유는 이렇게 긍정적인 이미지와 함께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지만, 왠지 모르게 후자에 방점이 찍혀있을 때가 많습니다. 다시 말해서, 부정적인 의미로 오해될 소지가 매우 다분합니다.



그러나 온유는 약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정반대로 강함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단어임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비유컨대, 가죽은 부드럽지만 질기고 강합니다. 비단도 부드러워 질감이 매우 좋지만 강합니다. 온유는 헬라어로 프라우테스(πραύτης)라고 하는데, 이 말은 원래 천방지축 사납게 날뛰는 야생마를 부리기 쉬운 온순한 말로 길들이는(domesticate, tame)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길들여진 말을 가리켜 ‘프라우테스 말’이라고 불렀습니다. 길들여진 말은 온순해졌지만 그렇다고 원래 가지고 있던 힘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예전처럼 야생마로서 아무도 걷잡을 수 없는 힘으로 질주할 수 있습니다. 단지 그 힘을 스스로 절제하기 때문에 주인의 뜻에 고분고분 따르는 것입니다. 온유는 한 마디로 ‘절제된 힘’(power under control)을 의미합니다. 절제된 힘을 쉽게 이해하려면 엄마가 아기를 다루는 모습을 상상해보면 됩니다. 엄마는 아기가 으스러질 정도로 꽉 끌어안을 수 있는 힘이 있지만 아기가 상하지 않도록 자기의 힘을 적절히 조절합니다. 이와 같이 온유는 ‘길들여진 부드러움’ 또는 ‘절제된 부드러움’을 말합니다.

온유가 성령의 열매인 까닭도 바로 이와 연관이 있습니다. 인간의 타고난 본성인 강성(剛性) 내지는 야성(野性)이 성령님에 의해 절제되어 부드러운 상태로 성화된 성품이 바로 온유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통제된 힘을 가지고 온유한 삶을 살게 됩니다. 버럭 화를 내며 혈기를 부릴 수도 있고, 마구 거친 언사를 내뱉을 수도 있지만 성령님의 제지를 받기 때문에 인내하고 자제할 수 있는 영적인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는 잠언 16:32의 말씀은 자제(self-control)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아주 실감 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옛날의 성들은 두께나 높이가 어마어마해서 좀처럼 무너뜨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자기 마음을 다스릴 줄 자는 이러한 성을 함락하는 용맹스러운 용사보다 낫다고 했으니 절제를 할 수 있는 자가 얼마나 강한 힘을 가진 자인지를 여실히 깨닫게 됩니다. 달리 말하자면, 온유가 그만큼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뜻입니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말이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요.

예수님은 이사야 42:2-3을 자신에게 적용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2:19)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cry out)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숱한 반대와 오해, 모욕과 모함, 핍박과 고난을 당하시면서도 왈왈거리며 다투거나 큰 소리를 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권위로 얼마든지 상대방을 제압하고 위세를 부리실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말씀 한 마디로 일거에 대적들을 물리치실 힘이 있으셨지만 그 힘을 다 행사하지 않고 오직 아버지께서 맡기신 인류 구원의 사명 완수를 위해 이 모든 것을 참고 견디시는 놀라운 절제력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별 대수롭지도 않은 힘이라도 그 힘을 과시해보려고 안달합니다. 쓸데없는 권위를 내세우며 어떻게든 상대방을 제압하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때로는 절제되지 않은 분노로 다른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고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히기도 합니다. 절제가 결코 쉽진 않지만 그래도 예수님을 본받아 꾸준히 노력하노라면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익숙해지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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