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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동 목사의 신앙칼럼

강남중 기자

김재동 원로목사 / 프로필


서울대학교 영문과, 전 청소년재단 이사장, 해외한인장로회(KPCA) 총회장 역임, 현 서울장로교회 원로목사, 전 워싱턴교역자회 회장, 전 워싱턴한인교회 협의회 회장, 목회학박사과정 수료, 워싱턴신학교(WTS) 기독교교육 박사과정 이수 중, PDSO, 강사



제자들의 팔로워십(Followership)



팔로워십은 리더십의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조직의 구성원들을 이끌고 관리하는 자를 리더(지도자)라고 한다면, 리더의 지시에 따르고 조직의 긍정적인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구성원을 팔로워(추종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팔로워로서 갖춰야 할 역량과 태도와 정신을 팔로워십이라고 합니다. 미국의 카네기멜론스쿨의 교수인 켈리(Robert E. Kelley)는 리더십과 함께 팔로워십에 대해서 오랫동안 연구해온 학자입니다. 그는 『팔로워십의 힘(The Power of Followership)』이라는 저서에서 “조직의 성공에 있어 리더가 기여하는 바는 20%에 불과하며 나머지 80%는 팔로워들의 덕분이다”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리더는 눈에 보이는 거대한 빙산의 드러난 한 부분으로서 조직을 이끄는 총체적인 상징의 역할을 하지만, 실제로 조직을 지탱하고 이끌어가는 자들은 팔로워들이라는 것입니다.

일단 리더는 팔로워(따르는 사람) 즉 조직의 구성원이 있어야 존재의 의미가 있습니다. 리더는 누군가를 이끌어나가야 하는데, 당연히 이끄는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유명한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는 “리더를 정의한다면, 따르는 사람들을 거느리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미국의 정치학자 제임스 번드는 “위대한 리더는 위대한 팔로워가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유리더십 연구의 선구자인 워런 베니스는 “리더십은 팔로워를 통해 비전을 현실로 이루는 능력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리더와 팔로워는 서로 대립되는 상반된 개념이 아니라 역할에 따른 상대적 개념일 뿐입니다. 따라서 리더십과 팔러워십은 동전의 양면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리의 관계입니다. 리더십과 팔로워십은 피차 영향을 미치며 시너지 효과를 내는 상호보완적 관계가 될 때 가장 이상적인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이 있습니다.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 안에서 껍질을 톡톡 쪼아대는 ‘줄(啐)’과 어미 닭이 밖에서 탁탁 깨뜨려주는 ‘탁(啄)’이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협업을 의미합니다. 리더십과 팔로워십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려면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마음가짐으로 서로 격려하고 용기를 주고 협력하는 마음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신 분이라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제자들의 능동적이고 순종적인 팔로워십이 없었다고 한번 가정해봅시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과연 예수님의 리더십이 그토록 찬란한 빛을 발할 수 있었을까, 하고 의문을 제기한다면 혹 불경스러운 발칙한 발상일지 몰라 자못 조심스럽긴 하지만 현실적으로 한 번쯤 던져볼 만한 질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의 리더십을 여러 각도에서 조명해볼 수 있겠지만, 기적을 베푸시는 신적인 능력이야말로 그분의 리더십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3:58을 보면, 예수님이 고향 땅에서 배척을 당하셨는데,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약 제자들이 예수님께 대하여 신앙적인 팔로워십을 가지지 않았더라면 예수님의 사역은 제한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체포를 앞두고 몹시 섭섭한 처신을 보이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그들의 희생과 헌신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리라 봅니다. 3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을 스승과 동가숙서가식(東家宿西家食)하면서 보낸다는 게 결코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미 가정을 이루고 있는 자도 있었는데, 가정과 처자식을 뒤로 하고 스스로 고생길을 택한다는 것은 감동을 넘어 눈물겨운 헌신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욱이 당장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히는 보상도 담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지도자도 아닌 추종자의 길을 가기로 결단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선택은 아닙니다.



‘제자’라는 용어가 신약성경에 대략 250여 회 등장하는데, 오직 복음서와 사도행전에만 나오는 특수용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서신서에 와서는 제자라는 용어 대신에 ‘성도’라는 용어가 통용되었는데, 윌슨이 쓴 『목회와 제자양성』이라는 책에 의하면, 제자라는 용어가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은 철학도라는 뉘앙스를 풍기기 때문에 성도라는 용어를 발굴해서 사용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오늘날까지도 제자라는 용어는 우리에게 뭔가 예사롭지 않은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제자라는 말 속에는 훈련이라는 개념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자(disciple)와 훈련(discipline)은 뿌리가 같은 단어입니다. 모름지기 제자라면 엄격한 기율 아래서 고강도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선생은 많으나 스승은 없고, 학생은 많으나 제자는 없다”라는 말과도 어느 면으로 맥이 닿아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주 칼럼에서 예수님의 ‘종의 리더십(섬김의 리더십)’을 다루었는데, 팔로워십에서 가장 먼저 언급되어야 할 훈련은 다름 아닌 ‘섬김의 훈련’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Servant Leadership’은 실천은 없고 직급을 내세워 그저 권위적으로 지시만 하는 ‘Headship’과는 전혀 결이 다릅니다. 섬김의 리더십은 희생과 헌신을 그 바탕에 깔고 있으며, 팔워십은 한결 더 높은 차원의 희생과 헌신, 심지어 목숨까지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제자들에게 이러한 마음가짐을 강조하시곤 했습니다.

(마태복음 16:24-25)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우리는 지금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늘 그러하지만 특히 사순절의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로드십(Lordship)’을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영혼의 구세주이심과 동시에 우리 삶의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님의 ‘주 되심’을 인정하고 겸손히 순종함으로써 진정한 팔로워십을 함양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따르는 법을 모르는 사람은 훌륭한 리더가 될 수 없다”고 했던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이끄는 법을 배우려면 먼저 따르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했던 루소의 명언도 맘속 깊이 새겼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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