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유에스코리아뉴스

김재동 목사의 신앙칼럼

강남중 기자

김재동 원로목사 / 프로필


서울대학교 영문과, 전 청소년재단 이사장, 해외한인장로회(KPCA) 총회장 역임, 현 서울장로교회 원로목사, 전 워싱턴교역자회 회장, 전 워싱턴한인교회 협의회 회장, 목회학박사과정 수료, 워싱턴신학교(WTS) 기독교교육 박사과정 이수 중, PDSO, 강사



성도의 교제(코이노니아)



미국 새들백 교회의 릭 워렌 목사가 쓴 『목적이 이끄는 삶』은 장기 베스트셀러로서 한때 세계 기독교계에 선풍을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그는 후속편으로 『목적이 이끄는 교회』라는 책도 썼는데, 이 책에서 성경에 기반해 교회의 다섯 가지 목적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교회의 다섯 가지 목적은 예배, 전도, 제자훈련(교육), 교제, 사역(봉사)입니다. 오늘은 이 중에서 교제에 대하여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교제를 헬라어(그리스어)로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 fellowship)라고 하는데, 신약성경은 헬라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성경에는 이 단어가 사용되었으며, 따라서 신학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이 원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코이노니아라는 용어는 크게 두 가지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과 그를 믿는 백성이 맺는 친밀한 관계를 뜻하며, 둘째로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 상호 간에 나누는 친교 즉 성도의 교제를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코이노니아는 두 가지 차원, 즉 수직적 코이노니아와 수평적 코이노니아가 있습니다.

(요한 1서 1: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성도의 교제는 하나님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교제를 전제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교제와는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신앙을 전제로 하지 않는 성도 간의 교제는 진정한 의미에서 성도의 교제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코이노니아는 문맥에 따라 친교, 관계, 공유(sharing), 교통(communication), 참여(participation), 동반(partnership), 사회(society) 등 매우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코이노니아는 그리스인들에게는 꽤나 친숙한 단어였습니다. 심지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낼 구제금 명목으로 거두는 연보도 코이노니아라고 불렀던 사실을 감안해볼 때, 이 단어는 신앙과 상관없이 그저 단순히 친목만을 목적으로 삼는 사귐이 아니라 성도들 간의 사랑을 저변에 깔고 ‘함께 공동의 그 무엇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participation in his sufferings, 빌립보서 3:10), 성령의 교통하심(fellowship of the Holy Spirit, 고린도후서 13:13), 성만찬에서 떡과 잔을 받음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것(participation in the blood and the body of Christ, 고린도전서 10:16), 그리고 이를 통해 성도들이 한 떡에 참여하며 한 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때, 모두 동일하게 코이노니아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성도의 교제가 하나님의 교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코이노니아의 가장 핵심적인 의미는 ‘참여’(participation)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의 교제는 참여가 없이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혹자들은 굳이 교회에 나가서 성도의 교제를 할 필요가 있는가, 교회에 나가지 않고도 얼마든지 성도의 교제가 가능하지 않은가, 이런 주장을 펴기도 합니다. 특히 요즘 코로나 사태로 인내 비대면 예배를 드리면서 이러한 주장이 더욱 힘을 얻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다가 자칫 무교회주의가 득세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도 없지 않습니다. 일본의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는 무교회주의를 주창한 자로 유명합니다. 그는 교회의 제도나 의식(儀式)을 부정하고 오직 성경과 신앙만을 중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일견 신앙적인 주장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반쪽짜리 진리이며, 반쪽짜리 진리는 때로 거짓보다 더 큰 악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의 이러한 무교회주의가 일본의 교회 성장의 발목을 잡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많이 있으며, 이러한 주장은 오늘날 일본 기독교계의 현실을 보면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일본은 한국보다 먼저 기독교를 받아들였지만 아직도 전체 복음화율이 2% 미만에 그치고 있는 실정입니다. 무교회주의자들은 코이노니아가 지니는 참 의미를 과소평가하거나 아예 무시하고 있습니다. 일단 모이고 참여해야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참여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교제가 가능하다는 사탄의 솔깃한 속임수에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참여하다’란 의미의 영어 단어 중에 ‘partake’가 있는데, 짐작컨대 part와 take 두 단어가 합성된 단어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숙어로는 ‘take part in’이 있는데, 이 두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참여는 어느 한 부분 또는 한 몫을 감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컨대, 참여란 직접적으로 ‘전체의 한 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언젠가 이웃 교회의 행사에 참여했을 때 흥미로운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행사가 끝나고 친교를 위해 친교실로 들어가려는데 친교실 양 문에 ‘fellow’와 ‘ship’이라는 두 단어가 양쪽으로 나뉘어 붙어있는 것을 보면서 어느 샌스쟁이가 나름 의도를 갖고 짐짓 그렇게 한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본능적으로 오월동주(吳越同舟)라는 고사성어가 머리를 스쳐갔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오월동주는 비록 평소에 원수지간일지라도 함께 곤란한 지경에 처하면 어쩔 수 없이 서로 도울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fellow + ship’은 풍랑 속에서 한 배를 타고 가는 동료들을 연상케 합니다. 최근에 개봉한 한국 영화 모가디슈가 바로 이러한 상황을 잘 대변해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때로 이런저런 일로 사이가 버성기기도 하지만, 예수님의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혈맹이요, 평생동지를 넘어 영생동지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원수 맺지 말고, 혹 서로 사이가 틀어졌더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피차 용서하고 용납하도록 의식적으로라도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25-27, 로마서 12:15)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 칼럼의 내용은 본 신문사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