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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동 원로목사의 신앙칼럼] 신앙의 집을 잘 지읍시다

최근에 어떤 분이 카톡으로 보내주신 글 중에 마음 속에 간직하고 싶은 글이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완전한 소유란 없으며 모든 생명체는 이 땅에 사는 동안 모든 것을 자연에서 잠시 빌려 쓰다가 때가 되면 고스란히 다 놓아두고 떠나야 하는 나그네임을 일깨우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글의 서두에 이런 재미있는 글귀가 있습니다.

“10일만 살다가 버리는 집이 누에고치이고, 6개월만 살다가 버리는 집이 제비들의 집이며, 1년을 살다가 버리는 집이 까치들의 집입니다. 누에는 집을 지을 때 창자에서 실을 뽑고, 제비는 자기 침을 뱉어 진흙을 만들며, 까치는 볏짚을 물어오느라 입이 헐고 꼬리가 빠져도 지칠 줄 모릅니다. 날짐승과 곤충은 이렇게 혼신의 힘을 다해 집을 지었어도 계절이 바뀌면 미련 없이 집을 버리고 떠나갑니다. 오직 사람만이 끝까지 움켜쥐고 있다가 종내는 빈손으로 떠나게 되지요.”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나그네 인생인데도 우리는 이 땅의 삶에 집착하며 마치 천년만년 살 것처럼 착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수한(壽限)이 차면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나 영락없이 이 땅을 하직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땅을 떠난다고 그것으로 모든 게 끝나는 게 아닙니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들도 이 세상의 삶 저 너머에 또 다른 삶 즉 내세(afterlife)가 있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이생에 이어지는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을 믿고 있습니다. 천국은 예수를 믿어 영생을 가진 자들이 가는 곳입니다. 모든 인간은 원죄로 말미암아 죄인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죄의 값을 치러야 하는데, 죄의 값은 영원한 죽음 즉 지옥형벌입니다. 그런데 죄인인 인간은 스스로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영원한 지옥형벌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어 그 분에게 우리의 모든 죄를 지워 십자가에서 그 죄값을 대신 치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대속(代贖)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대속의 은혜를 입은 자들은 마땅히 그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교회와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 때 하나님은 감사하게도 우리에게 상급(reward)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구원은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것이기에 공짜선물(free gift)로 거저 주셨습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은혜란 무자격자에게 무상으로 베푸시는 하나님의 호의(favor)를 말합니다. 그러나 상급은 다른 차원입니다. 상급은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떻게 크리스천의 삶을 사느냐 하는 것에 따라 비례적으로 베풀어주시는 또 다른 호의입니다. 성경의 맨 마지막 부분에서 주님은 친히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이 일한대로 갚아주리라(Behold, I am coming soon! My reward is with me, and I will give to everyone according to what he has done.)”

주님께서 심판주로 재림하실 때 우리가 행한 일을 따라 비례적으로 상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서 ‘상’은 리워드(reward)인데, 이것은 어떤 일을 행한 실적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신용카드(credit card)를 사용하면 사용한 금액에 따라 포인트를 받게 되고, 그 포인트에 따라 다양한 리워드(reward)를 받게 되듯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행한 실적에 따라 상급 포인트가 쌓이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10-15에서는 이것을 이해하기 쉽도록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의 터 위에 집을 짓는 비유가 나와 있는데, 그리스도의 터 위에 집을 짓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신앙의 터 위에 집을 짓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터 위에 집을 짓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래야 하늘의 상급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껏 피땀 흘려 고생고생하며 지은 집이 기초가 잘못되어 기울어지게 되면 집값을 제대로 쳐줄 수가 없습니다. 집을 사고팔 때 일차적으로 고려하는 것이 집의 지반입니다. 집의 어느 한 쪽이 조금이라도 기울어져 있으면 매매 자체가 어려워집니다. 뉴욕의 맨하탄에는 엄청난 무게의 거대한 건물들이 빼곡하게 늘어서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건물이 기울어지지 않고 그대로 반듯하게 서있는 것은 그 지반 전체가 거대한 암반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탈리아의 피사의 사탑은 5.5도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사탑(斜塔)으로 불립니다. 물론 지금은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명소가 되었지만, 토질이 부드러운 남쪽 부분의 지반이 약 14,000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기울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두 사례를 비교해볼 때 집이나 건물을 짓는데 기초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신앙의 집’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터 위에 지어야 합니다. 이 터 외에 다른 터는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3:10-11)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이단자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싸한 집을 짓지만 그리스도의 터 위에 지은 집이 아니므로 필경에는 모래 위에 지은 사상누각처럼 와장창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신앙의 집을 짓되 ‘잘’ 지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터 위에 집을 짓는데, 어떤 이들은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집을 짓고, 또 어떤 이들은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짓습니다. 어떤 자재로 집을 짓느냐 하는 것은 각자 자기 맘대로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지만 마지막 날에 그 집을 감정할 때 그 집에 대한 평가가 나오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고급 자재로 지은 집은 감정가가 높이 나올 것이고, 싸구려 자재로 지은 집은 감정가가 낮게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집의 질(quality)이 천양지차로 현격하게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집짓는 비유를 통해 우리가 어떤 ‘신앙의 집’을 지어야 할 것인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최종적인 감정사(appraiser)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인정해주시고 칭찬해주실 만한 그런 집을 지어야 합니다. 한 마디로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상급(reward)을 받을 수 있도록 양질의 집을 지어야 합니다. 적당히 눈가림으로 날림공사를 하거나 싸구려 자재로 허접하게 집을 지으면 일견 그럴듯하게 보일지 모르나 매의 눈으로 살피시는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많은 노력이 따라야 합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자기 몫에 태인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일이 그렇게 호락호락할 리가 없습니다. 그 십자가 지고 가기 힘들다고 다 팽개쳐버리고 맨몸으로 덜렁덜렁 홀가분하게 살고 싶은 유혹이 늘 우리 곁을 서성거립니다. 그러나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면 하늘의 상급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졸업식 때 다른 학생들은 열심히 노력해서 이런저런 상을 받는데 게으름피우다가 과정은 마쳤으니 겨우 졸업장 하나 달랑 받는다면 조금은 부끄러운 일일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상급을 쌓지 못한 자는 예수를 믿으니 천국엔 갈 수 있겠지만 마치 불 가운데서 얼굴이 화끈거리는 부끄러운 구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15)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서울장로교회 원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