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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동 원로목사의 신앙칼럼] 나그네 인생관

Published on: Sep 8, 2019 (9월 둘째 주일)

한때 최희준 씨가 불러서 히트한 노래 중에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부평 같은 내 신세가 혼자도 기가 막혀 가도 그만 와도 그만 언제나 타향”이라는 노래도 있습니다.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로 시작하는 구성진 노래도 있습니다.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라고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한 노래도 있습니다. 실향민들의 심금을 울릴 ‘그리운 금강산’이라는 유명한 가곡도 있습니다. 한국 노래의 노랫말을 보면 가곡이든 가요든 고향을 그리는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고향을 떠난 사람을 나그네라고 합니다. 나그네는 저마다 자기의 고향을 그리워합니다. 저는 버지니아주가 제 2의 고향입니다. 그리고 처음 미국 생활을 시작했던 센터빌이 저에겐 늘 정겹게 느껴지곤 합니다. 그래서 처음 살던 동네 근처에 가면 처음에 살았던 아파트 단지를 들러보기도 합니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신 어느 신학교 교수님이 한국 가요의 내용을 분석한 논문을 발표하신 적이 있는데, 그 논문을 보면 한국 가요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두 단어가 어머니와 고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머니와 고향은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왔고, 그래서 어머니는 우리의 무의식 속에 깊이 잠재해 있는 고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어머니의 태보다도 더 근원적인 고향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영원한 고향 즉 본향(本鄕)이 바로 그곳입니다. 이 땅은 우리가 나그네로 잠시 머무는 여인숙(旅人宿)과 같은 곳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언제든 나그네의 삶을 접고 본향으로 돌아가야 할 과객(過客)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생각을 품고 이 땅에서 유한한 삶을 살면서도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며 순례자의 삶을 사는 것, 이것이 바로 ‘나그네 인생관’입니다.

믿음장(章)인 히브리서 11장에는 바로 이러한 나그네 인생관을 가지고 살았던 믿음의 조상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8-10)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거류(居留)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낯설고 물선 가나안 땅에 가서 외국인처럼 타향살이를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후에 같은 약속을 받은 이삭과 야곱과 함께 영구주택이 아니라 임시거처인 천막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설계하셔서 견고한 터 위에 친히 건축하실 영원한 하늘의 도성(都城)을 바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13-16)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이스라엘의 3대 족장으로 불리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모두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된 것을 받지 못했으나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환영했습니다. 그들은 히브리서 1:1이 언급하고 있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Faith is being sure of what we hope for and certain of what we do not see.)라는 함축성 있는 믿음의 정의(定義)를 삶으로 여실히 보여준 진정한 믿음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모든 문장의 시작을 ‘믿음으로’(by faith)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믿음을 강조하고 있는 장(章)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함께 받은 약속은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을 정복한 때를 기점으로 역산(逆算)해보면 4, 5세기 후에나 이뤄질 일이었습니다. 물론 궁극적인 가나안은 영원하고 참된 휴식이 주어질 천국이지만 하나님은 천국의 그림자로 가나안 복지를 약속하셨습니다. 어쨌든 그들은 이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보지 못하였으나 이 약속이 틀림없이 성취될 것을 확신하는 믿음으로 미리 앞당겨 선취적(先取的)으로 은혜를 맛보며 멀찍이서 보고 환영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 잠시 머무는 나그네에 불과하다는 것을 스스로 고백했습니다. 그들은 이 땅 저 너머에 영원한 본향이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떠나온 옛 고향을 생각하고 있었더라면 얼마든지 살아생전에 돌아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이 땅의 고향인 우르나 하란으로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돌아갈 수 있었으나 그들은 이 땅의 고향에 미련을 갖지 않았습니다. 하늘에 있는 더 나은 고향을 사모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말에나 행동에 있어서 실제로 ‘나그네 인생관’을 보여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에 헷 족속에게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입니다.”(창세기 23:4)라고 말했습니다. 야곱도 애굽에 내려가 바로 앞에서 자신의 인생을 한 마디로 요약하기를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세기 47:9)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었기에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 구약시대에 가장 친근한 하나님의 칭호가 무엇이었습니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었던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 다윗도 나그네 인생관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29:15)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

우리는 믿음의 선배들처럼 나그네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천성을 향해 하는 나그네입니다. 최근에 신학교 박사과정 입학을 위해 추천서를 부탁한 어느 목사의 이메일 id가 ‘천국 나그네’였습니다. 저는 요즘 아침에 산책을 할 때 존 번연의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을 들으며 새삼 은혜를 맛보고 있습니다. 광안생명의 교회에서 녹음한 것인데 추천하고 싶을 정도로 아주 훌륭하게 제작된 오디오북입니다. 크리스천이라는 한 순례자가 천성(天城)에 도달하기까지의 여정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이동원 목사님은 2016년에 경기도 가평군에다 천로역정을 모티브로 해서 조성한 필그림하우스(천로역정 순례공원)를 신앙훈련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나 본향으로 가야 할 과객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생의 드라마가 끝나고 커튼이 내려지면 무대를 떠나야 할 존재들입니다. 그러고 나면 그 인생 드라마에 대한 평가가 내려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무렇게나 엄벙덤벙 살아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전서 2:11-12)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 1: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서울장로교회 원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