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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선교단상 [해외화교와 본토 중국기독교인] 중화권 이민우 선교사

이민우 선교사

중국인의 전통신앙적 사상체계의 맥 가운데 도교는 상당히 뿌리가 깊다.
어쩌면 유교와 불교보다 강하다.
공산사회주의가 시작된 1940년대 이후 유교와 불교는 그저 형식적 전통일뿐 생활에서 실천되지 않는 신앙체계같다.
그러나 음양설. 양명학과 같은 도교에 가까운 정신체계는 깊이 지금도 자리잡아 중국인의 사고에 영향을 적잖이 미친다.
현대 중국인들에게 풍수지리설로 인한 부동산 관련 구매 방법 기준과 이사의 습관이 많이 남아있다.

일본도 마찬가지이다
이사를 오려는 세입자가 어떤 방향에서 오는냐에 따라 집을 세 주지 않는 풍토와 맥이 비슷하다.
유교도 한국 조선시대의 전통으로 100년전 대한제국시대가 시작됐지만 여전히 관행상제등 의식의례는 유교적 요소가 많이 남아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일본과 중국은 한국보다 유교적 색채가 많이 탈색되어있다.

노녀자 우대석을 설치한것도 일본 중국은 한국보다 늦다. 그저 서방국가에서 시니어 좌석 양보가 사회사회이 되니 고유 문화였던 유교와 다시 접맥시킨 것 같다.

일본 중국에서 좌석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의 가방을 자기 무릎위에 놓아주도록 베푸는 친절은 중국 일본에서는 오히려 오해를 일으키는 행동이다.
소매치기로 오인 받기 싶상이다.
중국 일본은 기독교 전파 경로와 시기를 역사적으로 고찰해볼때 거의 비슷하다.

복음의 전파 경로는 영국과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칼 독일 이태리등에서 출발해 인도를 거쳐 말레이반도 말라카해협의 중간기착점을 거쳐 싱가포르 태국. 베트남 그리고 중국 광동성 특히 마카오와 홍콩을 거쳐 또 일본과 한국으로 전파 경로를 아시아교회사를 통해 배울수 있다.

중국에 기독교가 전파된것은 당나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교(景教) 네스토리안 이라는 당시 이단 판정을 받아 타국으로 세력확장을 시도했던 교파로서 아직도 그 당시의 경교 상황을 약술해놓은 기념 대형비석이 남아있다.
당시에는 민간신앙과 혼합형태의 신앙으로 많은 사원 흔적과 유물이 남아있다.

한때 상당히 번창하였다가 불교와의 충돌과 기독교 자체적 정체성 교리의 미정립. 토착화의 일시적 실패로 인해 점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버렸다.

그후 송왕조. 원 왕조 .명.청 때에도 잠시 미약한 기독교가 전파됐던 기록이 여러문헌에 남아 있다.

근대 200여년전 비로서 예수회등 포교활동과 마테오 릿치의 동방견문록등을 통해 서방에 중국이 소개되면서부터 영국을 중심으로
유럽 선교사들이 대거 중국으로 진출하였고
그때 최초로 로버트 모리슨 영국선교사가 인도를 거쳐 중국 마카오에 정착하면서 성경번역과 문서사역을 시작하면서 기점을 삼을수 있겠다.
선교사역에 성경이 필수적이기에 그리고 문맹퇴치를 위한 교육사역. 신문등 사회계몽. 중.영사전 편찬등의 기초적 사역을 통해 선교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의료사역등이 병행되었고 무역상의 활동에 힘입어 선교사역이 활발해졌으나 여러 요인으로 인해
선교사들의 통역등 소속문제가 발단이 되어 선교사들이 제국주의자들의 중국침탈의 수단 내지 앞잡이러 오인받아 태평천국의 난에 많은 서방 선교사들이 순교를 당한 역사가 있다.
때로는 마약 밀매자로 전통신앙과 문화 파괴자로 오인받아 살해 순교당한것이다.

눈 색이 다른 서양인들이 동양 아이들 눈을 몰래 빼간다는둥 이상한 괴담을 퍼트려 모략한 경우도 있고 선교현장에서는 공통적인 이슈로 상식에 가까울 정도이다.

2014년 필자는 매릴랜드 소재 중국인 성경교회에서 전시된 모리슨 선교역사 순회 전시회에서 저자 강의와 사인을 받아 피의 순교사와 희생적 사랑이란 책을 구매했고 필자가 운영하던 중국선교학교 학생들과 함께 전시관람과 회식을 나누며 감상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