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유에스코리아뉴스

김재동 목사의 신앙칼럼

강남중 기자

김재동 원로목사 / 프로필


서울대학교 영문과, 전 청소년재단 이사장, 해외한인장로회(KPCA) 총회장 역임, 현 서울장로교회 원로목사, 전 워싱턴교역자회 회장, 전 워싱턴한인교회 협의회 회장, 목회학박사과정 수료, 워싱턴신학교(WTS) 기독교교육 박사과정 이수 중, PDSO, 강사



한 므나의 인생

이제 우리는 2022년 임인년(壬寅年)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1년 365일이라는 선물을 공평하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살아 쉼쉬는 매순간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켜주지 아니하시면 우리에게는 ‘현재’라는 게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영어 present는 ‘현재’라는 뜻과 함께 ‘선물’이라는 뜻이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시간은 본디 하나님의 것인데, 우리 인간에게 일정한 기간 빌려주신 것입니다. 만일 시간이 내 것이라면 얼마든지 자신의 생명을 원하는 만큼 연장할 수 있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천하를 호령하던 영웅호걸도, 돈에 깔려 죽을 만큼 엄청난 부를 소유한 소위 수퍼리치(super rich)들도 하나님께서 시간을 거두어가시면 꼼짝없이 이 세상을 하직해야만 합니다. 진시황이나 스티브 잡스가 좋은 예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시간을 잘 관리하는 ‘시간의 청지기’ 역할을 성실하게 감당할 책임이 있습니다. 청지기는 주인(owner)이 맡긴 재산을 건사하는 일종의 관리인(manager)입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모든 피조물들을 잘 관리하라는 ‘문화 명령’(Cultural Mandate)을 주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최초의 직업은 관리인(manager)이라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우리는 재물의 청지기직에 대해서는 자주 강조하면서도 정작 재물보다 더 소중한 시간의 청지기직에 대해서는 별반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재물보다 더 소중한 것이 시간입니다. 재물로 시간을 살 수는 없지만 시간이 있으면 재물을 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비유 중에 ‘므나의 비유’(누가복음 19:11-27)가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주인이 열 사람에게 꼭 같이 은화(銀貨) 한 므나씩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기고, 어떤 사람은 다섯 므나를 남겼습니다. 주인이 열 므나 남긴 자에게는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었고, 다섯 므나 남긴 사람에게는 다섯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을 꼭 같이 칭찬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주인이 준 한 므나를 수건으로 싸 두었다가 주인에게 도로 돌려주면서, 주인님이 엄하신 분일 뿐만 아니라 주지도 않은 것을 내놓으라고 하실 분이기에 혹시라도 한 므나마저 까먹을까 염려한 나머지 그대로 잘 보관해두었다고 둘러댔습니다. 이 말을 들은 주인은 몹시 화를 내면서, 네 말대로 내가 그렇게 억지를 부리는 엄한 자라고 생각했다면 그 돈을 은행에라도 맡겨서 최소한 이자와 함께 돌려주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호되게 질책했습니다. 그리고 곁에 있는 자들에게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를 가진 자에게 주라고 하면서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고 했습니다.



이 비유에서 한 므나는 ‘한 몫의 인생’을 의미한다고 이해하면 무방하리라 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단 한 번의 인생을 삽니다. 그래서 일생(一生)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미국 ABC 방송국에서 장기간에 걸쳐 방영했던 ‘One Life to Live’라는 연속극(soap opera: 주로 낮 시간대에 주부들을 대상으로 비누 광고를 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 있는데, 이 연속극의 제목이 말해주듯이 인생은 단 한 번의 기회밖에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두 몫의 인생을 살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업적을 남겼다 할지라도 그건 그 사람의 인생이지 타인의 인생이 아닙니다. 이 한 몫의 인생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집니다. 범위를 좁혀 생각해 본다면, 2022년이라는 한 해도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졌습니다. 꼭 같이 365이라는 시간이 주어진 것입니다. 인생에서 이보다 더 공평한 게 또 있을까요? 적어도 이 점에 있어서는 그 누구도 불평을 하거나 불만을 터뜨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는 므나의 비유와 비슷한 포맷을 취하고 있으면서도 디테일에 있어서는 확연히 다른 ‘달란트의 비유’(마태복음 25:14-30)가 있습니다. 이 비유는 각자 받은 달란트(재능)가 다르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주인이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화(金貨) 다섯 달란트,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 또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줍니다. 겉으로만 보면 이것이 현실적인 상황입니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조건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서양 문화권에서도 출생 상황과 관련해 소위 금수저, 은수저(born with a golden/silver spoon in the mouth)에 대한 언급을 자주 하곤 합니다. 서양에서 유래한 소위 ‘수저 계급론’은 한국에 와서 더 세분돼 다이아수저, 동수저, 흙수저와 같은 말들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의 대선 유력 후보자들도 수저 계급론의 대상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한때 조국 교수의 트위터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흙수저의 아류라 할 수 있는 ‘가붕개’론(論)도 있습니다. “모두가 용이 될 수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개천에서 붕어, 개구리, 가재로 살아도 행복한 세상을 만들면 된다”는 그의 말이 실제 그의 삶과는 너무나 괴리가 있기 때문에 정치인들과 국민들 사이에서 조롱거리 삼아 자주 인용되곤 합니다. 현실적으로 수저 계급론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출발선이 다르고, 애초부터 운동장이 기울어져 있어 열심히 노력해도 앞서가는 자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좌절감과 패배의식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자들이 많습니다. 물론 달란트의 비유는 수저 계급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각자 받은 달란트에 비례해서 주인의 평가가 공정하게 내려지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수학은 절대치의 수학이 아니라 상대치의 수학이라는 점이 무척 위안이 될 때가 있습니다. 비록 남긴 달란트의 절대치가 다르지만 곱절을 남긴 자들에게 주인으로부터 한 획도 다르지 않은 꼭 같은 칭찬과 덕담이 주어집니다.

달란트의 비유와는 달리 므나의 비유는 처음부터 동일한 출발선상에서 시작합니다. 중요한 것은 거기에서부터 얼마나 잘 달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올 한 해 우리 모두가 적어도 시간에 관한 한 같은 선상에 서 있습니다. 모두들 성실한 자세로 피니시 라인까지 인생 경주를 잘 하셔서 “잘 하였도다(Well done),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는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칼럼의 내용은 본 신문사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