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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동 목사의 신앙칼럼

강남중 기자

김재동 원로목사 / 프로필


서울대학교 영문과, 전 청소년재단 이사장, 해외한인장로회(KPCA) 총회장 역임, 현 서울장로교회 원로목사, 전 워싱턴교역자회 회장, 전 워싱턴한인교회 협의회 회장, 목회학박사과정 수료, 워싱턴신학교(WTS) 기독교교육 박사과정 이수 중, PDSO, 강사



사랑하되 믿지는 말라



오래 전에 미국에서 발간한 목회 관련 서적을 읽다가 “성도를 사랑하라. 그러나 믿지는 말라”는 목회 지침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친 생각은, 미국인들도 한국인들과 생각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기본성향은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배신감까지는 아닐지라도 서운함을 느낄 때가 종종 있습니다. 마음 속으로 아끼며 큰 기대를 하면서 정성을 쏟았는데 어느 날 별치 않은 일로 교회를 떠나는 교인들을 볼 때면 정말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때로는 목회자와는 상관 없는 일로 마음에 상처를 받고 교회를 떠나면서도 그 탓을 목회자들에게 돌리는 경우도 자주 경험하게 됩니다. 담임목사가 부임할 때 가방 들어 준 자가 가방 들려 내보낸다는 냉소적인 말도 있을 정도니까요. 그럴 때면 목회자도 인간인지라 섭섭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공생애 마지막 단계에서 가장 힘든 순간에 제자들이 자기 살겠다고 스승을 버리고 뿔뿔이 흩어졌을 때 아마도 비슷한 심정이 아니셨을까 싶습니다. 사실 예수님처럼 우리 인간의 마음을 속속들이 꿰뚫고 계시는 분도 없을 것입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긴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 속이 비록 열 길이 된다 해도 그 속을 훤히 들여다보실 수 있는 분입니다.

(요한복음 2:23-25)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요한은 예수님이 베푸신 기적(miracle)을 짐짓 표적(sign)이라는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이 이 복음서를 쓴 목적을 직접 밝혔듯이 예수님이 기적을 베푸신 것은 단순히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그리스도(메시아)임을 보여주시려는 데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20:30-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그 당시 예수께서 희한한 기적들을 베푸시는 것을 보고 그를 믿은 자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결국 어떻게 됩니까? 자기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줄 혁명적이며 군사적인 메시아로서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기들을 해방시켜주기는커녕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맥없이 처형되는 모습을 보면서 열광적으로 그를 추종하던 무리가 일순간 배신자로 돌변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향해 “그 십자가를 박차고 내려오라. 그러면 믿겠노라”고 외칩니다. 사도 바울도 “유대인은 표적을 요구한다”(고린도전서 1:22)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믿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야박스럽고 서글프게 들리겠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사랑의 대상은 될지언정 믿음의 대상은 못 되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경건한 사람일지라도 사람은 신뢰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합한 자(a man after my own heart)’라고 극구 칭찬하셨던 다윗조차도 하나님의 신뢰를 저버리는 실수를 범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부부 간에도, 부모와 자식 간에도, 형제 자매 간에도 불신으로 인해 발생하는 비극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부자에게는 자식은 없고 상속자만 있다는 시니컬한 말도 현실적으로 자주 입증되고 있습니다. 부정부패도 워낙 규모가 커서 실감이 가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밥을 이기는 충견이 드물고, 돈을 이기는 충신이 드물다”는 말이 정말 실감이 납니다.

요즘 한국의 대선판을 보노라면 정말 가관입니다.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 조회수를 높이느라 검증도 되지 않은 선정적인 헛소문을 시도때도 없이 열심히 퍼나르는 유투버들 때문에 악의적인 마타도어(흑색선전)와 중상모략이 판치고 있습니다. ‘초연결 사회’에서는 과거의 잘못이나 실수로 한순간에 훅 가는 일이 자주 벌어집니다. 비호감 대상이나 혐오 대상에게 인정사정없이 퍼부어대는 악플들을 대하노라면 마치 갈 데까지 가버린 막장 드라마를 보는 느낌이어서 떨떠름한 마음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정말 해도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영어식으로 “Enough is enough!”입니다. 그런가 하면 철석같이 믿었던 자들에게 발등이 찍히거나 고양이에게 생선 가게 맡긴 격이 되는 예도 비일비재합니다. 물론 그중에는 사회적으로 유익을 끼치는 순수한 공익제보자와 내부폭로자가 없진 않으나 ‘왜 하필 이때인가’라는 의문을 자아내는, 동기가 미심쩍은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대선 후보자들도 뻔한 거짓말을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마구 내질러대는 걸 보면서 아연실색을 금할 수 없습니다. 결국 이 모든 행태는 인간의 본성적인 죄성으로 인한 불완전함과 한계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친히 지적해주고 계십니다.

(예레미야 17:9-11)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계속 불신 속에서 살아야 할까요? 비록 불완전한 인간이지만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조금씩 조금씩 닮아가는 성화의 길로 나아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이 있듯이, 성화의 길은 단걸음에 내달을 수 없는 길이기에 한 걸음씩 그러나 꾸준하게 가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전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아진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리라는 희망을 품고 매일 정진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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