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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일 칼럼

강남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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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K 라디오 방송위원, 재외동포저널 이사, 하이유에스코리아 칼럼니스트



노태우 전 대통령의 타계와 87체제의 종언.



제13대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 전 대통령이 26일 지병 악화로 별세했다. 향년 89세. 고인은 1987년 6월 항쟁 직후 집권 민정당 대선 후보로서 ‘6·29 선언’을 발표해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여 이른바 87체제를 만들어 낸 뒤 그해 12월, 13대 대선에서 당선된, 대통령 직선제 도입 후 첫 대통령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군 출신 대통령이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과 관련된 이들 한국 정치의 역사적 사건은 지금도 국민들의 뇌리에 생생할 만큼 충격의 연속이었다. 신군부 세력의 핵심 중 하나로 1979년 12·12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의 핵심부에 진입한 그는 숱한 정치적 위기를 거친 끝에 육사 11기 동기인 전두환 전 대통령에 이어 1988년 제13대 대통령으로 청와대에 입성했다.

1979년 공고롭게도 같은 날인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거는 그의 일생을 바꿨다. 혼란 속에서 육사 내 사조직인 ‘하나회’ 출신으로 제9사단장을 맡고 있던 노 전 대통령은 그해 12월 12일 쿠데타에 가담하게 된다. 이어 1981년 육군 대장으로 예편한 그는 전두환 대통령 시절 정무장관, 체육부장관, 내무부장관,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승승장구했다.

1985년에는 2·12 총선에서 전국구로 국회에 진출해 민주정의당 대표위원으로 활동하며 사실상 ‘후계자’ 지위를 보장받았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에 대한 거부감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대한 국민적 열망은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분노와 어우러졌고 민심은 극도로 이반됐다.

결국 1987년 ‘6월 항쟁’은 전국으로 퍼져갔고, 그해 6월29일. 그는 민정당 대표 로서 기자회견을 자청했고 대통령 직선제 수용, 김대중 사면복권과 시국사범 석방, 국민기본권 신장, 언론자유 보장, 지방자치와 교육자치, 정당 활동 보장 등 ‘6·29 선언’ 8개항을 읽어 내려갔다. 이른바 '1987년 체제' 탄생을 가져온 것이다.

온건 군부세력의 이미지를 구축한 그는 그해 12월16일 16년 만에 실시된 대통령 직접선거에 민주정의당 후보로 출마해 야권이 통일민주당 김영삼,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로 분열된 상황에서 36.6%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하지만 그의 국내 기반은 허약했다. 1988년 4월 26일 소선거구제를 도입해 실시된 13대 총선에서 역사상 최초로 ‘여소야대(與小野大)’ 국회가 탄생했다. 호남의 평화민주당, 영남의 통일민주당을 양 김씨가 장악한 가운데 민정당 중심의 정국 운영이 어렵게 됐다. 노태우 정권은 정계개편을 도모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퇴임 후의 신변 보장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1990년 1월 22일. 3당 합당을 공식 선언하고 민주자유당을 출범시켰다. . 여소야대 구도는 순식간에 216석의 거대 여당과 왜소한 야당의 구도로 재편됐다. 그러나 이미 노태우 대통령의 힘은 빠지고 있었다.



1992년 김영삼 대표가 차기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자 9월 18일 노태우 대통령은 민자당을 탈당했다. 아이러니하게도 1990년 3당 합당 체제는 현재의 정당구도의 시발점이 됐다.

김영삼 문민 정부 들어서자 12·12 군사쿠데타에 대한 단죄 여론이 불길처럼 일었다. 1995년 당시 검찰은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그해 10월 19일 당시 민주당 박계동 의원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노태우 비자금 의혹을 제기하면서 상황이 돌변했다. 비자금 의혹 규모는 4000억 원에 달했다.

검찰은 수사 착수 2주일 만에 전직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노 전 대통령을 소환 조사했고 결국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뇌물) 혐의로 구속했다. 그는 군 형법상 내란 혐의 등으로도 기소됐고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징역 17년, 추징금 2628억 원의 형이 확정됐다.

그는 1997년 12월18일 물러나는 김영삼 정부가 당선자의 뜻을 받아들인 특별사면 조치에 의해 석방됐다. 2013년 9월에는 남은 230억 원의 추징금을 모두 납부하면서 16년을 끌어온 미납 추징금 논란을 마무리 지었다.

그는 재임 시절 이른바 ‘물태우’로 표현되는 유약하고 소극적인 리더십에 대한 불만도 나왔지만 일각에선 어쨌든 그의 주도의 직선제 도입으로 우리나라가 군부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 이행되는 계기가 마련됐고, 대외적으로는 중국과 소련 등 공산권 국가들과 수교하는 등 탈냉전의 북방정책을 펼친 점은 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무엇보다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에 따른 국격 선양, 1988년 7·7선언과 함께 시작된 소련·중국 등 공산권 국가와의 수교,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체결과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등은 그의 결단이 없었다면 쉽지 않았을 일이다. 토지공개념제 도입과 대규모 주택 공급으로 신도시 개발 서민 생활 안정과 중산층 확대를 도모한 것, 각지의 도로건설 등도 평가할 만한 대목이다. 같은 군인 출신임에도 전임자 전두환과는 달랐던 유화적인 스타일은 보통사람들의 시대라는 모토처럼 한국 사회의 탈권위주의화에도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면 이후 보여준 행보도 전두환과는 사뭇 달랐다. 추징금 납부를 거부하고 잊을 만하면 망언을 일삼아온 전두환과는 대조적으로 외부활동을 삼가며 자숙하는 모습을 보였다. 법원이 선고한 추징금도 2013년 완납했다.

그의 죽은은 87체제의 종언을 뜻한다. 어정쩡한 타협의 산물인 87체재는 이제 그 효용과 수명을 다했다. 지금의 비효율적인 헌법도 선거제도의 근간도 그 채제의 산물이다. 그동안 끊임없이 이 체제의 개선이 논의 됐지만 민주화, 경제화, 진보 보수 양 세력의 이해 타산으로 어정쩡하게 흘러 왔던것이 사실이다. 87체제의 주역이었던 3김도 모두 진작에 세상을 떠났고 이제 그마저 떠나면서 한시대가 확실하게 저물었다는 모두가 절감하고 있다. 이제 남은 사람은 전두환 전 대통령 한 사람인데 그의 요즘 모습은 더 추하다는 것이 많은 이들의 소회 아닌가. 대선 국면 맞아 다수 후보들이 87체제 청산을 악속 하고 있기에 기대를 가지고 주목할 일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위대한 대한민국과 국민을 위해 봉사할 수 있어서 참으로 감사하고 영광스러웠다”며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그럼에도 부족한 점및 저의 과오들에 대해 깊은 용서를 바란다”고 했다. 장례는 간소하게 치러 달라고 했다. 국가장 국립묘지 안장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만 저간의 상황을 감안해 현명하고 합리적인 결정이 나오기를 바란다. 우리 많은 동포들이 영욕을 함께 점철한 인간 노태우의 영면을 목도하면서 명복을 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