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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동 목사의 신앙칼럼

강남중 기자

김재동 원로목사 / 프로필


서울대학교 영문과, 전 청소년재단 이사장, 해외한인장로회(KPCA) 총회장 역임, 현 서울장로교회 원로목사, 전 워싱턴교역자회 회장, 전 워싱턴한인교회 협의회 회장, 목회학박사과정 수료, 워싱턴신학교(WTS) 기독교교육 박사과정 이수 중, PDSO, 강사



봉사(디아코니아)



지난 칼럼에서는 ‘성도의 교제’를 의미하는 헬라어 ‘코이노니아’에 대하여 언급했습니다. 오늘은 ‘봉사와 섬김’을 의미하는 헬라어 ‘디아코니아(διακονια)’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일반 성도들에게는 다소 익숙하지 않은 단어일 수 있겠으나 독일 교회의 경우는 헬라 원어를 그대로 사용하기도 하고, 또 그 외 나라에서도 이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단어에서 우리가 잘 아는 집사라는 말이 파생되었는데, 집사는 헬라어로 ‘디아코노스(διακονος)’라고 합니다. 디아코노스는 문맥에 따라 종, 노예, 식탁 봉사자, 사역자 등 다양한 의미로 번역이 되지만 한 마디로 뭉뚱그린다면 ‘일꾼’을 의미합니다. 집사(執事)라는 한자어를 직역하면 집안일을 꽉 잡고 있는 사람 즉 집안일을 맡아보는 고용인이나 관리자를 이르는 말입니다. 지금도 좀 여유가 있는 가정에서는 집사를 고용해서 집안일을 돌아보게 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의미에서 집사는 좁게는 하나님의 집인 교회, 그리고 넓게는 하나님의 나라 전반의 일을 맡아 시중들고 관리하는 자라고 이해하면 무방하리라 봅니다.



디아코니아는 복음전도와 함께 교회의 본질을 표현하는 수단입니다. 교회는 복음을 전파하고 사회에 봉사하는 기관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사랑의 이중계명을 받들어 실천하는 기관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시대 조류나 지도자의 신학적인 입장에 따라 이 둘 중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보수주의적인 교회는 전자를 강조하고, 진보주의적인 교회는 후자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1907년 이후 10년간 소위 ‘사회복음(Social Gospel)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라우센부쉬(Walter Rauschenbusch)는 전통적인 기독교 경건주의에 불만을 품고 교회가 개인의 영혼구원보다는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사회구원에 힘써야 할 것을 역설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이냐 빵이냐’라는 양자택일의 문제를 넘어서서 오히려 우선순위의 차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복음전도가 사회봉사보다는 우선순위가 앞선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교회가 사회봉사를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는 보수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저는 ‘복음이냐 빵이냐’ 즉 ‘영혼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라는 거대 담론은 차치하고 일단 좁은 범위에서 한 지역교회 안에서의 디아코니아에 초점을 맞춰보려고 합니다. 성경에서 ‘집사’라는 직분이 처음으로 언급된 곳은 사도행전 6장입니다. 사도들이 구제하는 일에 몰두하다 보니 정작 그들 본연의 직무인 기도와 말씀 사역을 제대로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대안이 집사들을 세워 구제 봉사를 맡기고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 사역에 전념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집사의 직무가 가난한 교인들을 구제하는 일에만 국한되어야 한다는 의미는 물론 아닙니다. 집사들을 선택한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사도들의 본연의 직무일 뿐만 아니라 교회의 본연의 사명인 복음전파를 돕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 안에서의 모든 봉사는 교회가 수행해야 할 본연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조력하는 데 집중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한몫 봉사’를 강조했었습니다. 모든 교인들이 각자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한몫의 봉사를 감당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아이디어를 갖게 된 계기는 플로리다에 있는 교단 산하의 한 교회를 방문한 것이었습니다. 그 교회의 화장실에는 화장실 청소를 담당하는 자들의 명단과 함께 그들이 담당해야 할 봉사가 아주 구체적으로 적혀있었습니다. 화장실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의 봉사도 아주 자세하게 분담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 아이디어를 적용해보기로 했습니다. 그 교회만큼 아주 세부적으로 하지는 못했지만 큰 틀에서 적용하면서 ‘한몫(one share)’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한몫’의 개념을 교회 시설을 관리하는 데에만 한정하지 않고 필요할 때마다 ‘한몫 기도’나 ‘한몫 재정한금’ 등 다양한 분야로 확장해서 사용했습니다.

‘한몫 기도’의 경우, 담임목사가 당연히 모든 교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지만 우선적으로 부교역자들이나 당회원들 그리고 중직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부교역자들은 담당 교구를 위해, 구역장들은 구역식구들을 위해, 각 부서장은 그 부서를 위해 기도하게 함으로써 가능한 한 중보기도의 사각지대(blind spot)를 줄여보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리고 ‘한몫 재정헌금’의 경우는 교회가 재정적으로 어려울 때 몇몇 소수의 교인들이 짐을 다 지려면 크게 부담이 되니까 각자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의 범위 안에서 자기의 몫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가령 한몫을 100불로 정했다면, 어려운 분은 반몫 그리고 여유가 있는 분은 몇 몫을 감당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재정적인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바자회를 할 때도 선교회별로 분담해서 맡기면 무리 없이 잘 감당할 수 있었고, 세월이 지나면서 하나의 전통처럼 굳어져 매번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도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한몫’의 개념을 적용할 경우 좋은 점은 모든 교인들이 교회를 위해 일정 부분 관심을 갖고 참여할 수 있게 됨으로써 소외감을 해소하고 주인의식을 갖게 된다는 점입니다. 모든 교인들이 손님교인이 아니라 주인교인이 될 수만 있다면 그 교회는 진정 건강한 교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사소한 봉사라도 ‘함께’ 할 수 있다면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지체들의 협력을 통해 견실한 공동체로 성장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전도서는 협력의 중요성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전도서 4:9-12)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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