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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선교단상 이민우 중화 권 선교사 . 평양 대 부흥과 중국선교

중국선교단상 이민우 중화 권 선교사

이민우 선교사

1980년 성균관대학 중문과 졸업
1985년 국립대만 사범대학 国文研究所( 대학원 졸업)문학석사
1985년 12월부터 1988년 12월 까지 일본 동경 도립대학 중문과 박사전 과정
1986년 7월 100년 넘은 品川교회내 한인 장로교회에서 회심
1989년 4월 서울 중구 정동 서울화교교회에 출석시작.
1995년 필리핀 마닐라 중국인 성경교회 (장국강 목사, cbcp.org)파송

평양 대 부흥과 중국선교
지난 2007년 한국은 평양 대 부흥 100주년을 기념했고 그 행사의 일환으로 “목표가 이끄는 삶 ” 릭 웨렌 목사가 내한하여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에서 특별 집회를 열어 필자도 참석을 했었다..
세계에 흩어져 있는 중국기독교인들은 2007년 그 해에 근대 기독교 200주년을 경축했다.. 물론 중국 당대(唐代)에 조로아스터교 (景教)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지만 우선 근대 기독교 즉 영국 문서선교사 Robert Morrison 을 시점으로 본다.

같은 2007년 여름에 한국제주도에서 중국기독교 200주년 기념행사로 중화권 선교대회가 성대하게 거행 되었고 후속 대회가 지속되어 왔다.

아마도 중국은 나라 면적이 넓고 인구가 많고 전통적 정신체계인 유교 도교 노장사상 법가 불교등 그 외에도 많은 미신 등 각종 잡신을 우상숭배 해와서 복음화가 매우 느려서 여전히 선교대상국으로 떠오르기 때문에 중국을 잘 이해하지 못한 채 섣불리 우월감으로 선교하려는 마음자세가 왕왕 많은 실수를 야기해왔다.

중국에 기독교가 한국보다 60여 년 훨씬 먼저 전해졌다고 한다.

중국을 비롯해 많은 선교대상국에 대한 연구와 선교정책도 제대로 준비 못한 채 주먹구구식으로 선교하는 것은 지양 해야 한다.
아직도 여전히 준비 부족한 학도병 같은 선교사를 보낼 것인가 ?

반면 100여 년 전의 최초 선교 사례를 연구해보면 내용면에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영국계 미국 이민후예 언더우드 장로교 선교사와 독일계 미국이민 후예 아펜젤라 감리교 선교사가 일본을 경유해 한국에 입국한 1885년 4월5일 부활절 아침에 제물포항에 도착한 기준으로 한다 해도 복음을 받은 지 불과 30여 년만인 1913년에 조선은 중국산동에 선교사 3명을 파견했다.

당시 조선의 예루살렘 대 각성 이라는 명예스런 평양 대 부흥의 전말은 유튜브나 SNA 를 활용해 보기를 권한다.
여기서는 다른 곳에서 다루지 못한 부분을 중점적으로 다룰 것이다.

당시 중국과 조선은 모두 백인 선교사들 뿐 이었고 두 나라 모두 피선교국 이 었는 데다가 서양선교사들의 영향이 대단하던 때였고, 조선은 국가적으로도 주권을 상실한 일본식민지배가 이미 수년간 시작된 시기였으며 조선 장로회총회가 창립된 지 불과 만 1년이 경과한 시점이었으니 어찌 대단한 역사가 아니겠는가?”

1912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제1회 때 평양에서 개회 임원 선출해 회장에 언더우드 선교사가, 부회장 에 길선주가 선출되었다.
그러나 서양선교사가 총 회장이 되었다는 점은 당시에 여전히 서양선교사의 영향이 컸고 완전한 자치로서의 이양은 이뤄지지 못했다.
1912년 창립총회에서 타 문화권 선교사 파송 청원이 이뤄졌다.

이렇게 실질적인 타 문화권 선교를 시작한 조선기독교의 선교정책은 어떠했는가 되짚어 봄으로서 과거의 산동선교역사를 표본으로 하여 현재와 장래 선교정책을 세움에 있어 좀더 저비용, 고효율의 선교를 펼칠 수 있도록 방안을 간구하기 원한다.

평양 대 부흥 각성운동으로 결성된 조선 장로회총회가 복음에 빚진 자로서의 부담으로 처음 정한 나라가 바로 이웃 중국의 산동지역.
그것도 오랜 세월 중국의 정신적 지도자격인 유교를 집 대성한 공자 고향에서 가까운 래향(莱阳)으로 정한 이유는 조선 시대 역시 유교의 윤리규범으로 통치되었던 과거역사를 복음으로 되갚자는 영적인 깊은 뜻이 내재되어 있던 것이다.

그렇게 당시로서는 여러 조건과 상황이 매우 불리했음에도 과감하게 그러나 철저하게 준비한 내용들을 되짚어 보고자 한다.

1914년 박태로, 사병순, 김영훈 등 세명의 선교사가 산동에 파송 되었으나 2년 만에 열악한 환경과 풍토병 등으로 귀국하고 말았다..
1917년 한국 장로교회가 산동선교 재개를 결의하였을 때 후임으로 방효원, 홍승한, 박상순, 이대영, 김순호(여 선교사), 방지일 선교사가 산동성 으로 최혁주목사가 만주 국 으로 각각 파송 받아 사역하게 되었다.
방효원(1886~1953)이 질병으로 산동선교를 중도 하차한 선임선교사 1호 박태로 선교사와 산동 선교지 시찰을 다녀온 뒤 자원하였다.
그는 1886년 7월2일 평북 철산 군 여한면 에서 출생, 아버지 방만준을 따라 예수를 믿었다. 신성학교에서 양전백 목사와 위대모(Norman C. Whittenmore) 선교사로부터 신앙적 훈련을 받은 방효원은 1909년 6월 신성학교 제1회 졸업생이라는 영예를 얻었다.
이후 그는 1911년 평양신학교에 진학하여 선교사 마포 삼열(Samuel Austin Moffett)에게서 배웠고, 신학교를 졸업한 후 평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철산 영동교회를 목회하던 중이었다.

라이양(来阳)에 거주하면서 김병규 조사의 도움을 받아 중국어 학습을 하고 1년 만에 내양현에 교회가 설립되면서 추가 선교사 파견으로 힘을 얻어 1931년에는 30여 교회를 세워 내양노회를 조직하더니 초대 노회장의 영예를 얻었다.

특별히 내양노회의 회원교회가 자립, 자치, 자전을 실천하여 당시 피선교국 조선과 중국에 시행된 네비우스 선교전략에 기초하고 있었다는 점은 오늘날 중국교회의 삼자운동의 기초가 되었다고 해서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방효원은 감옥 전도와 걸인구제에도 힘썼고, 복음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지 발로 뛰어 선교사의 소명을 충실히 감당했다.

선교사들이 교회 개척 등의 사역을 감당할 때 선교사로 파송 된 것은 아니지만 함께 선교지 에서 공동 사역을 했던 선교사자녀 학교 교사 조소임, 리영애, 그리고 선교회 학교교사 편순남 (학원선교), 의료선교로 분담했던 김윤식 ,주현식, 안중호 의사(의료선교)가 한 팀이 되어 복음사역을 이룬다. 김윤식 의사는 최초의 장로교회 새문안 교회 교인으로서 의료선교에 동참한 것이다.
소위 상황화 선교라고 한다.

위에서 말한 대로 목사로서 30여 개 교회를 설립하였는가 하면, 16차례의 제직 사경회가 마침내 라이양 성경학교를 설립하였다. 토착민 교회지도자 양성을 목적하여 1923년 1월 1일에 설립된 본 학교는 1년 2학기로 매 학기에 한 달씩 3년 과정으로 첫 입학생은 8명이었다. 방효원이 최초로 해외에서 학교를 세웠다는 영예를 얻는 순간이다. 의료 선교사 안중호는 1932년 내양(莱阳)에 애린(愛邻)학교, 치박(ZIBO: 淄博)에 애도(爱道)학교를 설립 하여 합세했다. 1919년 의사 김윤식의 내양 남관 병원개업과 더불어 1932년 의료선교사 안중호의 병원개설이 시도되었다.

‘화인(华人)을 얻으려면 화인(华人)이 돼야 한다’는 방효원의 신조는 중국 옷을 입고, 중국말을 하고, 중국인들 사이에서 사는 것을 넘어서서 중국교회 목사회원이 되었다. 반 기독교인에게 조차 존경의 대상이 되었던 이유는 바로 화인(华人)이 되고 화인의 목사가 되었던 데 있었고, 이 점에서 오늘날 선교한국이 선교지 교회와의 협력에 소극적인 태도와 대조를 이룬다. 현지 교회와의 협력보다는 독자적인 방법을 선호하는 지금의 한국선교의 취약점의 하나이다.
내지 전도 확장에 따른 해외선교 축소 정책에 따라 방효원은 1935년까지 18년의 중국선교를 마쳤다.

방효원 선교사의 초기 어려움을 조금 소개하면 중국 현지교회지도자들로 부터 소외 시 당하고 업신여김을 받은 이유는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 나라 상태에서 조공 바치던 조선의 선교사가 산동에 온 것 자체가 불편했던 것이다. 불필요한 자존심이 작용했던 것이다.
한동안 소외 당하던 것을 극복하여 현지인의 마음을 얻기까지 상상할 수 없는 노력이 필요했다.
또 눈 폭설로 사택 지붕이 무너져내려도 고치지 못한 채 추위를 견디지 못해 안면 마비가 와서 고생을 많이 했다.

1936년에 총회 전도 부 파송으로 상해 조선교회에서 1944년까지 사역하였고, 1945년 이후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던 1953년 까지 국내에서 목회를 계속하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부지런함을 보여 주었다. 방효원은 1937년 그의 아들 방지일이 산동선교사로 파송 됨에 따라 아버지에 이어 아들까지 이른 부자선교사 제1호가 되었다.
이상의 내용은 방효원선교사 자서전을 작성해 아들 방지일 목사가 시무하던 영등포교회에서 발표한 성서대, 칼빈대,총신출신 외항선교사 , 인천 지구촌교회 담임. 선린교회 파송 국내 외국인 근로자 사역 선교사, 인천 화교교회 수원화교교회 대구화교교회 담임 이였던 김교철 목사의 내용 중에서 부분 발췌한 것임을 밝힙니다. 이랜드 사목 방선기목사가 방지일 목사의 조카뻘이다.
그날 발표후 함께 옆자리에서 식사를 같이 했다. 방선기 목사와의 인연은 경기도청 국제협력실 전문위원 시절 도청 기독 신우회 에서 특강 마치고 함께 전철 타고 귀가하면서 교제한 인연이 있었다.

자 그럼 그렇게 시작된 중국선교가 산동에서 어떤 부흥을 일으켰는가?

평양 대부흥을 역작으로 저술한 박용규 총신대 원로 교수의 글 일부를 인용한다.
첨부 사진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