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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선교단상3. 평양대부흥 영향 아래 한국내 중국선교

중국선교단상 평양대부흥 영향 아래 한국내 중국선교

지난주 평양 대 부흥과 그 여파로 1912년 평양장로 노회에서 중국산동 선교사 파송의 역사적 기록을 간단히 살펴보았고 이번 주는 같은 맥락이지만 해외선교가 아니고 1910년대 당시 조선의 국내 선교 상황과 접목해서 이어가야 할 것이다.
당시 조선에는 많은 수의 산동을 위주로 한 중국인 (화교华侨)가 서울과 인천 제물포를 중심으로 거주하며 농사 벽돌공 서울역 물건 하역인력, 농업 등에 종사하고 있었고 (사진 별첨하는 한국화교사 책 참조 ),
일본인은 조선 전국에 분포하며 거주하며 경제 침탈을 진행하고 있었고(1924년에 출판된 “조선에 있는 지나인 (支那人) 일어 책 자료 총 203 페이지 : 원본은 여의도 국회도서관 고문서 실에 보관중 복사본은 서울 화교교회 내 애화(爱华도서관 내에 필자가 복사 제본해 보관 중)

일본인이 당시에 중국인을 부르는 호칭) 이 자료를 보면 일본이 어떤 능력을 가진 나라인지 소름이 끼칠 것이다. 그들의 연구력 과 조사력 집필력 등을 배울 필요가 있다. 대동아 전쟁을 준비하던 일본의 아시아 침략 계획 등을 면밀히 알아보면 그들은 유일하게 일본을 우습게 경멸하는 한국인들은 정말 일본이 그런 존재의 나라인가 역사적 감정에 얽매여 진실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 지 염려가 된다.

참고로 필자는 한중 국교가 수립되지 않아 중국본토에서 박사를 공부할 수 없어 1985년 12월에 일본 동경에서 박사前 과정을 공부하다 초기에 1985년 당시 100년 넘은 역사 있는 동경 품천(品川)교회에서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한 배경이 있는지라 일본에 대해 어느 정도 피상적이 아니고 직접 체험한 바가 있다.

(교회 입구 사진은 1999년 경기도청 파견 코트라 외자유치 정부 통합사무소 에서 일본 투자유치 로드맵 출장 갔을 때 찍음)
이웃나라 국민들이 주요 외국인들이었고 미국인 캐나다인 영국인 러시아인, 독일인들이 차례로 주재인구분포를 보이고 있을 때였다 .
1910년경 한일합방이 이뤄지던 해 즈음 서울에는 새문안 장로교회 중심과 정동 제일감리 교회 중심으로 교구를 형성하던 때였다.
당시 감리교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의 조직신학 교수이며 종로교구 포교를 담당하던 Charles Scott Deming 목사는 상처(丧妻)후 재혼한 Edith Cushing Adams 와 조선에 와서 서울과 인천지역에 분포해 거류하던 화교들을 발견한다.

Mrs Deming 여사는 중국선교사 자녀로 중국 절강성 금화(金华)에서 태어난 영국선교사의 자제로서 중국어가 가능했고 자연스레 부모 선교사 영향으로 중국인 영혼들 구원에 관심을 가지던 중 새문안교회에서 예배중 당시 중국 복장 기포(旗袍)를 입고 있던 차도심 장로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감리교 총회에서 중국본토 선교뿐 아니라 조선내에 들어와 사는 외국인 즉 중국인과 일본인들에 대한 포교를 결정하게 되어 1912년 드디어 서울 화교교회(中华基督教汉城教会가 창립되게 되었다. 데밍선교사는 당시 처음으로 연희동에 소재하는 서울 외국인 학교도 설립한다. 당시 늘어난 선교사등 외국인 자녀 교육에 착안한 것이다.

데밍 선교사

처음엔 데밍 선교사와 차도심 장로가 중심이 되어 새문안 교회 장소를 빌려 예배를 드리다가 후에 종로에 소재하던 YMCA 강당, 피어선 신학대 건물 등 부근 건물에서 중국인 예배를 시작한다. 여기서는 지면의 한계로 인해 간단하게 기록하지만 독자중에 더 많은 자료가 필요하신 분은 개인 이메일로 요청하시면 되겠습니다.

조선에서 가장 오래 된 새문안 장로교회와 정동감리교회의 합작품이라 할 수 있는, 교단을 초월한 협력이 있었기에 중국인 교회가 잉태 창립하게 됐으며 아직도 많은 한국의 목회자들은 국내에 1912년에 창립된 2022년에 꼭 110년 된 중국인 교회가 있다는 사실 조차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성화교교회 90년사를 필자가 3년전 파라과이로 파송 되어 현지 한인 장로교회와 현지 중국인 장로교회를 돕는 협동사역을 하고 있는 김교철 목사( 방효원 방지일 부자 선교사 자서전을 편찬해주고 발표한)와 두 명 이 자료수집과 보완, 정리 재구성 등의 거의 1년 반 넘는 방대 작업 끝에 2002년 교회창립 90년사 특간 을 출판했고 필자의 처가 모든 문장을 중국어로 번역, 타자 ,자료정리, 사진 정리 등을 해서 협력해 완성한 귀중한 자료이다.

한국화교들도 엄두를 못 내고 처음 해본 자료를 김교철 선교사의 기초작업 위에 필자가 미국과 일본 중국 자료 등을 집대성해서 만들어 낸 것이다. 아무도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는 그때나 지금이나 거의 같은 교계의 분위기를 알지만 이런 선교역사의 정리 작업은 매우 가치 있는 사역중의 하나이다.

더 많은 선교 관심 자들이 현장 선교 못지 않게 중요한 선교역사를 통해 온고지신 (温故知新: 옛 것을 상고하여 배워서 새것을 알아간다 라는 고사성어) 즉 역사를 모르면 패망한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선교역사와 현 상황을 균형 있게 배우지 않고 선교는 비효율적 일수 밖에 없다.

한국교회는 어쩌면 선교하면 해외선교만을 생각하기 쉬운데 엄연히 국내 거류하는 외국인에 대한 등한시하던 시각을 넓힐 필요가 있다.
지금은 이미 선교의 지리적 한계가 점점 없어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저 눈 여겨 보기만 해도 세계 어디에도 자국 내에 들어와 거류하는 외국인이 아주 많은 세계화 시대이다.
미처 선교 마인드가 부족해 그들을 품지 못하고 그저 해외선교에만 급급한 것은 세계적 선교 흐름을 모르는 소치이다.

지난 주 평양 대 부흥이 중국 만주와 산동 지역에 끼친 영향, 그리고 그 여파로 산동에서 중국 전국으로 복음은 전파되기 시작해서 (물론 이미 서양 선교사들이 복음 사역을 80여 년 넘게 감당해 오긴 했지만) 조선의 평양 대 부흥의 역사적 기록들은 세계 복음 역사에 빠질 수 없는 선교역사의 일부이다. 그 거룩하고 강력한 영향은 지금의 중국의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온주(温州)까지 퍼진 것이다.
결국 평양 대 부흥은 중국산동 분 아니라 조선 내의 중국인 교회로 까지 발전한 것이다.